파블로 에스코바르 |
초기 생활과 범죄의 시작
파블로 에밀리오 에스코바르 가비리아는 1949년 12월 1일 콜롬비아의 리오네그로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농부였고, 어머니는 교사였습니다. 에스코바르 가족은 그가 어렸을 때 메데인 근교의 엔비가도로 이주했습니다.
에스코바르는 10대 시절부터 범죄의 길로 들어섰습니다. 그의 초기 불법 활동은 다양했는데, 가짜 졸업장 판매, 성적표 위조, 스테레오 장비 밀수, 묘비 도난 및 재판매 등이 포함되었습니다. 또한 자동차 절도도 저질렀는데, 이로 인해 1974년 첫 체포를 당했습니다.
1970년대 중반, 에스코바르는 마약 밀매에 뛰어들었습니다. 콜롬비아가 코카인 산업의 중심지로 부상하면서, 그는 이를 기회로 삼아 범죄 조직을 확장했습니다. 1975년경 메데인의 마약 밀매업자 파비오 레스트레포가 살해되었는데, 이는 에스코바르의 명령에 의한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에스코바르는 범죄의 세계에서 빠르게 성장했습니다. 그의 야망과 무자비함은 그를 콜롬비아 최대의 마약 제국을 건설하는 데 이르게 했습니다.
에스코바르는 레스트레포의 조직을 장악하고 대규모로 확장했습니다. 그는 볼리비아와 페루에서 대량의 코카 페이스트를 구입하여 가공한 뒤 미국으로 운송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악명 높은 메데인 카르텔이 탄생했습니다.
메데인 카르텔의 전성기
1980년대 중반, 메데인 카르텔은 코카인 거래를 장악했고 에스코바르는 엄청난 권력과 부를 누렸습니다. 그의 재산은 약 250억 달러에 달했다고 합니다. 이는 2022년 기준으로 약 700억 달러에 해당하는 금액입니다. 에스코바르는 7년 연속으로 포브스지 선정 세계 최고 부자 명단에 올랐습니다.
에스코바르의 부는 상상을 초월했습니다. 그는 개인 비행기, 호화로운 저택, 그리고 화려한 파티를 즐겼습니다. 1980년대 후반에는 콜롬비아의 100억 달러 국가 부채를 대신 갚겠다고 제안하기도 했습니다. 단, 그 조건으로 자신을 미국으로 인도하지 않는다는 약속을 요구했습니다.
에스코바르의 가장 유명한 재산 중 하나는 '아시엔다 나폴레스'라는 7,000에이커 규모의 호화로운 저택이었습니다. 이 저택에는 축구장, 공룡 조각상, 인공 호수, 투우장, 비행장, 테니스 코트, 그리고 동물원까지 있었습니다. 저택의 정문에는 그가 첫 마약 운반에 사용했던 비행기가 장식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에스코바르의 엄청난 부는 관리하기 어려울 정도였습니다. 그의 동생에 따르면, 매년 약 10%(21억 달러)의 현금이 쥐에 의해 먹히거나 습기로 인해 부패했다고 합니다. 일부는 단순히 보관 장소를 잊어버려 분실되기도 했습니다.
에스코바르의 부는 너무나 거대해서 그는 매주 약 2,500달러를 고무줄 구입에 사용했습니다. 이는 현금을 묶는 데 필요한 양이었습니다.
에스코바르는 자선 활동으로도 유명했습니다. 그는 병원과 경기장을 건설하고 빈민을 위한 주택을 제공했습니다. 이러한 활동으로 '로빈 후드'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습니다. 이런 대중적 인기에 힘입어 1982년에는 콜롬비아 의회의 대체 의석에 당선되기도 했습니다.
폭력과 테러의 시대
하지만 에스코바르의 자선 활동은 그의 잔혹한 범죄 행위와 대비됩니다. 그는 문제를 해결할 때 "plata o plomo"(은 아니면 납)이라는 방식을 사용했습니다. 즉, 뇌물을 받아들이거나 죽음을 택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에스코바르의 명령으로 약 4,000명이 살해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의 희생자들 중에는 정부 관리, 경찰관, 일반 시민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1989년에는 정보원으로 의심되는 사람을 제거하기 위해 여객기에 폭탄을 설치해 100명 이상의 무고한 승객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1989년, 여러 차례의 협상 시도와 판사들과 공무원들에 대한 선별적 암살 끝에 메데인 카르텔은 에스코바르의 지휘 아래 정부에 대한 전면전을 선포했습니다. 에스코바르는 대규모 암살단을 조직하고 자금을 지원하여 콜롬비아의 주요 인사들을 암살했습니다. 자유당 지도자 루이스 카를로스 갈란이 대표적인 희생자입니다.
또한 에스코바르는 콜롬비아의 주요 도시들에서 무차별적인 테러 행위를 자행했습니다. 이러한 마약 테러 캠페인은 국가를 불안정하게 만들었고, 1990년대 초 에스코바르를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범죄자로 만들었습니다.
에스코바르의 폭력은 상상을 초월했습니다. 1989년부터 1993년까지 그는 657명의 경찰관을 살해했으며, 칼리 카르텔, 마그달레나 메디오 안티오키아 준군사 조직, 로스 페페스와 치열한 충돌을 벌였습니다.
몰락과 최후
1991년, 콜롬비아 정부와의 협상 끝에 에스코바르는 자수했습니다. 그는 다섯 년형을 선고받았지만, 그의 수감 생활은 매우 특별했습니다. 에스코바르는 '라 카테드랄'이라 불리는 호화로운 감옥을 직접 지어 그곳에서 지냈습니다. 이 시설에는 나이트클럽, 사우나, 폭포, 축구장까지 갖춰져 있었습니다. 심지어 전화기, 컴퓨터, 팩스 기계까지 있었습니다.
그러나 1992년 7월, 정부가 그를 다른 교도소로 이송하려 하자 에스코바르는 탈옥했습니다. 이후 콜롬비아 정부는 미국의 도움을 받아 대대적인 수색에 나섰습니다.
16개월간의 도주 끝에, 1993년 12월 2일, 에스코바르의 44번째 생일 다음 날, 그의 메데인 은신처가 발견되었습니다. 콜롬비아 경찰과의 총격전 끝에 에스코바르는 옥상에서 사살되었습니다. 일부에서는 그가 자살했을 가능성도 제기합니다.
에스코바르의 죽음은 메데인 카르텔의 몰락을 가속화했고, 코카인 거래에서 콜롬비아의 중심적 역할도 끝나게 되었습니다. 그의 최후는 콜롬비아 정부와 세계 여러 나라에서 축하를 받았지만, 많은 콜롬비아인들은 그의 죽음을 애도했습니다. 2만 5천 명 이상의 사람들이 에스코바르의 장례식에 참석했습니다.
파블로 에스코바르의 생애는 범죄와 폭력, 그리고 막대한 부와 권력이 어우러진 극적인 이야기입니다. 그의 삶은 오늘날까지도 많은 책과 영화, TV 프로그램의 소재가 되고 있으며, 마약 전쟁의 참혹한 현실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예로 남아있습니다.
에스코바르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범죄와 폭력의 무서움, 그리고 그것이 사회에 미치는 파괴적인 영향을 상기시킵니다. 동시에 빈곤과 불평등, 부패한 정치 시스템이 어떻게 범죄를 양산하는지도 보여줍니다. 에스코바르의 유산은 복잡하고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그의 이야기는 여전히 우리에게 중요한 교훈을 전해주고 있습니다.